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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8-10 10:06
[프레시안] [프레시안_0810] 협동조합이 대안이다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3,841  

해고도 비정규직도 없는 협동경제를 왜 모를까

[협동조합이 대안이다]<4>정리해고,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는 외눈박이 국가주의자들

기사입력 2011-08-10 오전 8:25:06 
자본주의자들이 왜 한국에서는 진보라고 불릴까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민주당의 정치인들은 그렇다 치고, 이른바 진보개혁 세력의 논객이라고 분류되는 사람들이 앞 다퉈 김진숙의 희망버스는 진보의 재앙이라느니, 시장경제 아래 정리해고 철폐는 불가능한 목표이며 사회주의 체제나 가능한 일이라느니 하고 주장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더불어 참여해서 만든 뜨거운 열정과 공명, 협동과 연대의 행진에 재를 뿌리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이른바 한국의 진보개혁세력으로 이야기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의 견해를 대신한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 틀림없다.

지금까지의 노동운동 역사는 분노와 투쟁의 역사였다.
분노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이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정의가 사라지고 부패하고 불평등하고 포악하고 불의한 한국의 정치경제와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 흩어진 개인으로는 무력한 모래알에 지나지 않지만, 분노한 수많은 사람이 함께 힘을 모아 투쟁하고 행진을 하면 아무리 광폭한 자본과 권력의 탄압도 물리칠 힘이 생긴다.

그러나 분노와 투쟁만으로 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설혹 한진중공업의 소유주인 한진 재벌 회장의 숭고한(!!??) 결단으로 정리해고 일부 철회의 타협이 이루어져 김진숙 지도위원이 농성을 풀고 내려온다 해도, 조금 지나면 제2, 제3의 김진숙이 또다시 타워크레인으로 올라가야 할 상황이 틀림없이 발생한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한진중공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 어떤 집중 조명이나 여론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안전장치 없이 해고를 밥 먹듯이 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의 근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다양한 논의를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른바 진보개혁 성향의 논객들이나 정치인들 가운데 상당수의 사람은 해고와 비정규직을 철폐할 수 있는 대안은 없다고 단언한다. 사회주의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수용은 불가피하다는 논리이다.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는 \"그런대로 용인할 수 있는 경영 행위\"이며 이른바 진보세력이 정리해고 철폐를 지고지선(至高至善, 최고선)의 목표로 주장하는 한 집권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지난날 젊디젊은 시절에 사회주의자로 열정을 불태웠지만 1990년대 초반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생각이 바뀐 사람들은 한국 사회에 너무나 많다. 지금 이 시점에서 신자유주의의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불가피하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분명히 자본주의자들이다. 이들은 한국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로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판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찌 됐든 자본주의를, 그것도 신자유주의를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이 정체성을 진보라고 주장하면 말이 안 된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진보라고 자리매김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사기이다.

이런 자본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을 진보로 착각하게 만든 게 바로 이른바 한국의 \'수구 꼴통\' 보수세력들이다. 이들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요구조차 빨갱이들의 요구로 딱지를 붙일 만큼 한국 사회를 오랫동안 민주주의와 자유가 압살당한, 극심한 반공 정신병동의 철창에 가둔 범죄자들이다. 사회주의라는 말조차 아직도 꺼내기가 무서운 \'애비\'의 금기어였다. 조지 오웰이 그린 <1984> 같은 파시스트 세상이 한국 사회였던 것이다. 그런 광기의 국가 통제와 독재와 억압, 민주주의와 자유의 말살과 탄압은 남과 북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한국의 진보주의자란 사실 그 범주가 너무나 넓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과 같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당연시하는 이 삭막한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고 새로운 상부상조의 공동체 사회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런 자본주의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이른바 진보개혁 진영이라는 말과 현실을 과감하게 해체해야 한다. 도대체 해고와 비정규직이 당연하다고 하는 \'진보개혁\' 세력이란 게 말이 되는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철폐는 불가능할까

해고와 비정규직 철폐는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당연히 불가능하다. 아니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고도성장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본주의 기업의 대명사인 주식회사의 최대 이윤을 위해서는 더 많은 임금 착취를 보장하는, 광범위한 실업자 군이 늘 있어야 한다.

제3의 길이니, 따뜻한 자본주의니 합리적 자본주의니 복지 자본주의니 하는 식으로 자본주의 앞에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대학에서 편하게 평생직장을 보장받으면서 월급 받고 지내는 이른바 경제학자들의 대중 사기용 화장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자본주의란 단언컨대 없다. 일찍이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나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인 칼 폴라니가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란 오직 이윤만을 위해 작동하는, 아주 냉혹하기 그지없는 악마의 맷돌일 뿐이다.

그런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여겨졌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념 또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함께 역사의 창고로 사라졌다. 물론 사회주의의 이념 지도는 너무나 넓어 아직도 여전히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실천하는 국가와 지역은 많이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또한 여전히 자본주의의 쌍둥이로서 지구자원과 에너지를 지속 불가능하게 낭비하는 성장의 경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우리가 추구해야 할 21세기 한국의 대안 경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면 한국의 노동자들이 그토록 염원해 마지않는 \'정리해고 없는 세상,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일까.

전혀 아니다. 해고도 비정규직도 없는 대안의 경제 체제는 바로 우리 눈앞에 있다. 그런 세상은 유토피아도 아니고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세상이다. 1시간만 시간을 내, 요즘 \'쥐박이 방송사\'란 칭송을 받고 있는 KBS 한국방송의 전혀 \'쥐박이 방송\' 같지 않은 프로그램, <스페인 몬드라곤의 기적>을 시청해보면 금방 눈이 훤해 질 것이다.
(☞http://www.kbs.co.kr/1tv/sisa/kbsspecial/vod/1707965_11686.html)

스페인 몬드라곤 협동조합에는 해고가 없다. 계절별 요인과 파트타임 노동을 선호하는 여성들 때문에 비정규직이 있긴 하지만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과 똑같고, 1년이 되면 정규직이 될 것을 강요(!!)당한다.

111개 협동조합, 120개 자회사 등 총 255개 사업체로 구성된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몬드라곤 협동조합 기업(Mondragon Corporation)은 스페인에서 9번째로 큰 기업으로, 2008년 세계경제 위기 당시 수많은 기업이 문을 닫고 정리해고를 단행해 고용률이 20%나 하락하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1만4938명의 신규 고용을 창출하며 성장세를 이어갔다. 세계 건축예술의 정상급으로 평가되고 있는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세운 몬드라곤 건설, 스페인 가전시장 30%를 차지하고 있는 파고르(Fagor)전자는 모두 몬드라곤 그룹의 협동조합 기업이다. 몬드라곤의 유통그룹 에로스키(Eroski)는 경제위기 속에서도 19%나 성장하며 164개 신규매장을 열었다.

협동조합은 국제노동기구(ILO)가 2009년 발간한 「경제위기와 협동조합 사업모형의 강점」(Resilience of Co-op Business Model in Times of Crisis, www.ilo.org)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리고 이외에도 무수한 연구논문이 지적하고 있듯이 특히 금융경제 위기와 공황 국면에서 그 안정성과 일자리 창출 효과가 강렬하게 입증되었다.

2008년 빛을 발한 협동조합을 전 세계가 주목하자, 유엔은 2010년 1월 제64차 정기총회에서 2012년을 \'세계협동조합의 해\'로 지정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는 1844년 영국의 로치데일 공정개척자조합 결성 이래 근 170여 년 동안 발전해 온 협동조합이 이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뛰어넘어 새로운 대안의 사회경제 모델로 정착되고 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한국에서는 협동조합이 1997년 금융위기 당시 오히려 왜 몰락했을까

한국에서도 협동조합운동은 일제 강점기부터 연면히 이어져 내려와 한국전쟁 이후에는 1950년대부터 리동 농업협동조합운동이, 1960년 부산에서 설립된 성가신용조합을 효시로 한 신용협동조합운동이, 1986년에는 한살림운동이 시작된 역사가 있다. 그럼에도 왜 한국에서는 일반 인민들 사이에서 협동조합이 대안의 경제체제로서 확실하게 각인되지 못했을까.

그것은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이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잃고 국가에 종속되거나 자본주의의 규모화, 성장화를 추구함으로써 협동조합에 대한 일반 인민들의 인식을 스스로 부정의 방향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스스로 조직하고 있던 리동농협을 해체하고 농민 통제기관으로서 박정희 정권이 위에서부터 강압으로 만든 농업협동조합이야 논외로 치자.

1960년 이후 민간에서 일반 인민들의 상부상조하는 신용조합으로서 나날이 확대 발전하고 있던 신용협동조합들은, 1980년대부터는 자본주의의 경영합리화를 앞세워 몇 개의 신용조합들이 합병하여 거대 금융기관으로 규모화하는 쪽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1997년 8월 조합원 수 500만 명 돌파에 1700여 개에 육박하던 한국의 신용협동조합들은 그 직후 몰아닥친 국제통화기금의 신탁통치 아래 빛을 발하기는커녕 오히려 수많은 신협이 망해서 문을 닫고 말았다. 이른바 공적자금이 투입되어 간신히 목숨을 건진 신협들은 이후 더더욱 제2금융권 기관으로 제도화되고 말았다.

사실 노동 유연화니 정리해고니 비정규직이니 하는 용어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을 앞장세운 국제 금융 마피아들, 모건과 록펠러 제국이 하루아침에 한국의 부를 모두 빼앗아 간 \'한국약탈\' 이후에 이들이 강요해서 받아들인 말들이다. 이런 금융자본주의의 강탈 경제에 대항해서 해고도 비정규직도 없는 대안의 협동사회 경제를 강렬하게 구축했어야 할 협동조합들이 한국에서는 오히려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스스로 내팽개쳐 버리고 자본주의 금융 정글로 들어가 고스란히 거대 초국적 금융 괴물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농협과 신협은 소수의 지역농협과 지역신협을 제외하고는 지금은 협동조합이 아니다. 심하게 말하면 협동조합의 이름을 팔아 서민과 농민을 착취하고 있는 아주 질 나쁜 기생충들이다. 이들 중앙회는 재정경제부(현 지식경제부, 2008년 이후 바뀜) 퇴직 모피아 관료들이 낙하산으로 내려와 똬리를 튼 채 인민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있는 일종의 정부산하 기관이 되어버렸다.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은 이런 관변 협동조합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역에 뿌리내린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의 협동조합들과 뒤늦게 출범한 한살림, 아이쿱, 두레생협, 의료생협, 한겨레두레공제조합 등 새로운 생협들이 협동조합운동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면서 새로운 대안의 협동경제를 구축하고 있다.

진보라는 우물 안에서 벗어나야 대안 경제가 보인다

마르크스는 언제나 국가를 거대한 노동착취 체제로서 부정하고 자유인들의 연합체로서의 공동체 경제를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로버트 오언(Robert Owen, 영국의 사상가·사회 개혁 운동가)이나 생시몽(Comte De Saint-Simon,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가) 같은 선각자들의 협동조합운동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폄하하면서도 협동조합운동 자체에 대해서는 \"노동대중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협동조합 방식의 노동을 전국 규모에서 전 인민들이 실천에 옮겨야\" 한다면서 강조하곤 했다. 나아가 \'노동자들이 소유한 협동조합 공장들 사이의 전국적 연합이 코뮌 주의의 조직원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866, 국제노동자협회 1차 총회 결의문)

그러나 마르크스를 추종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철저한 국가주의를 실천에 옮겼고 공동체를 해체하면서 동시에 협동조합을 억압하고 해체해 버렸다. 그 결과는 조지 오웰의 <1984> 였고, 그리고 비극의 몰락이었다.

한국의 이른바 진보개혁세력은 아직도 여전히 이런 국가주의의 색안경을 벗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이외에는 대안을 찾지 못한 이들이 그래서 시시때때로 정리해고가 불가피하다느니 하면서 기껏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은 결국 재벌 총수나 자본가들의 합리적 경영이니 뭐니 그런 것들이다. 자본가에게 매달려 애걸복걸하는 것이 대안이라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희망버스는 우리 사회에 아직도 이런 분노할 줄 아는 정의가 살아 있음을, 따뜻한 인간다움의 이웃사촌이 있음을, 협동과 연대의 힘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시대의 상징이다. 이런 협동과 연대야말로 협동과 연대의 협동사회경제 체제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힘이 아닐 수 없다.